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민족의 식사량 (문단 편집) === 고대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안악3호분 부엌 일부.png|width=3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무용총 접객도 밥그릇.jpg|width=373]]}}} || || {{{-1 {{{#000000 [[안악 3호분]](357 AD) 벽화의 일부.}}}}}} || {{{-1 {{{#000000 [[무용총]] 접객도(5세기)의 일부.}}}}}} || 현재 쓰는 일반적인 밥그릇의 크기는 350g이 들어갈 정도이지만, [[조선]] 시대에는 690g, [[고려]] 시대에는 1,040g, [[고구려]] 시대에는 무려 1,300g의 밥그릇이 발굴되었다. [[고구려]] 벽화를 통해서도 옛 선조들이 [[대식가]]였음을 알 수 있는데, 상단에 첨부된 표 중 좌측 벽화에 있는 여인이 밥을 짓는 [[시루]]의 크기와 우측 벽화 속 밥그릇에 수북히 쌓인 밥의 양만 보아도 [[고구려]]인들의 식사량이 상당했다는 사실을 이끌어낼 수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김춘추]]가 하루에 먹는 양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왕은 하루에 드시길 '''[[쌀]] 3말[* 쌀 3말은 삼국시대 기준 6kg] 과 [[꿩]] 9마리'''를 젓수셨는데, 경신년에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는 점심은 그만두고 아침과 저녁만 하였다. 그래도 계산하여 보면 하루에 '''쌀이 6말, 술이 6말, 그리고 꿩이 10마리'''였다.[* 식사를 줄였다 해놓고 오히려 양이 늘어났기 때문에 앞의 기록을 '1끼'에 쌀 3말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 번역은 이거다.] 성 안의 시장 물가는 베 1필에 [[벼]]가 30석 또는 50석이었으니 백성들은 성군의 시대라고 말하였다. ─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etId=5&itemId=sy&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position=1&levelId=sy_001r_0020_0360_0050|삼국유사]] 실로 어마무시한 식사량이다. 거기다 이렇게 군주가 밥을 많이 먹는데도 탐욕스럽다는 비판을 듣기는 커녕, 성군의 시대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면 임금 이하 백성들의 식사량도 많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이건 혼자 다 먹는 것이 아니라, 먹을 만큼 먹고 남는 것은 아래의 신하들이 나눠먹는 방식이었다. [[수라상]] 문서의 물림상(퇴선) 관련 내용이 있다. 아래에서 언급된 '[[밥]]'은 흰 쌀밥이 아니라 [[잡곡]]밥일 가능성이 높다. [[쌀밥]]을 원없이 즐겨 먹는 건 주로 높은 신분에 한정되었다. [[삼국시대]] 한반도의 [[귀족]] 계층은 [[쌀밥]]을 먹었지만, 평민들은 잡곡밥을 먹었다고 한다. [[부여]]에 관한 중국 역사서의 기록을 보면 "부여는 [[오곡]]을 기르기 적합하다."고 적혀 있다. 참고로 중국의 오곡과 한국의 오곡은 다르며 위서 지리지에서 오곡과 쌀을 따로 기록한 만큼 이 오곡에 쌀이 포함되지는 않았다. 현대에는 [[만주]] 지역에선 [[이모작]]이 불가능하고 조선 사람들이 [[간도]]로 이주해 [[벼]]농사를 짓기 전까지는 벼농사가 오랫동안 되지 않았던 지역이었지만 [[고구려]]가 있었던 그 시절은 연 평균기온이 지금보다 3~5도 정도 더 높았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 내륙 지방인 마한, 백제 영토들 상당수가 당시에는 해안가였다.] 그래서 북위 45도인 만주 중부 지역에서도 이모작이 가능했고 동토인 [[그린란드]]도 실제로는 풀이 뒤덮인 섬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서기 10세기에 소빙하기가 도래하면서 연 평균기온이 뚝 떨어져서 그린란드는 동토가 되었고 만주 지역은 벼농사가 힘든 땅이 되어버린 것이다. 1300년 전과 지금은 기후가 약간 달랐다.[* [[4군 6진]]을 개척한 조선왕조 시절과 고구려 시절 만주의 자연환경의 차이는 너무 달랐기 때문에 조선 왕조는 고구려 시절과는 달리 농토로 이용하기 힘든 척박한 땅으로 변한 만주에 그렇게 큰 욕심을 내지 않았을 법하다.] 다만 이러한 대식이 전반적인 생애에 걸친 충분한 영양 공급을 보장했다고 보긴 어렵다. 그랬다면 조선시대에 이미 현 대한민국의 평균 신장에 이르렀을 것이다. 아래에서 보듯 탄수화물은 정말 원없이 먹었을지 몰라도 단백질이나 지방은 부족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실제 한민족의 식사량이 많은 것과는 별개로, 근대 이전의 기록의 경우 조금 고려해야 할 부분은 있다. 고대에는 인물의 신분과 능력을 과시할 때 실질적인 지식이나 능력 뿐만 아니라 그 개개인의 체구, 외모나 식사량, 주량 등도 그 '능력'에 포함해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의 유능한 무장들이 말술을 마시고 많은 양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도 결국은 '이렇게 술과 음식을 많이 먹을 수 있을 정도의 힘과 재력이 있다'는 점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자신의 근황을 살피는 왕에게 '''밥을 1말에 고기를 10근씩'''[* 춘추전국시대 단위로 한 말은 3L로 현대기준 대략 밥 15공기 정도 정도 고기 10근은 2.2kg 현대 기준으로 15인분 정도 이 정도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다]이나 먹고, 한바탕 말을 타고 달렸다던 [[염파]]가 그 예. 또 그와 비슷한 의미로 작게는 개인의 부(富)나 권력, 지위, 크게는 국가 전체의 국력도 이런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현대의 뉴스나 신문기사도 사실과 과장하여 보도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며 근대 이전의 기록에서 인물이 대식을 했다고 해서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그 인물의 능력과 신분을 과시하기 위한 각색일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김춘추도 이런 해석이 나오고 있다. 이러한 사료 해석은 한국사뿐만 아니라 전근대 시대의 역사 전체의 보편적인 요소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